‘성자 이싸가 예수라고? 노토비치 탐사보고서 의문’
유대에서 행상을 따라 인도로 넘어가 부처의 제자가 된 예수그리스도. 불교계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기며 일부 스님은 예수는 부처의 제자라며 설법한다. 성경도, 예수도 모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의 부처 제자설에 단초를 제공한 ‘예수그리스도의 알려지지 않은 삶’이라는 책은 1887년 정교회 신자인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인도 북부를 여행하면서 쓴 탐사보고서이다.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저널리스트인 노토비치가 인도 북부와 히말라야산 험지를 여행하면서 우연히 라마승(티벳불교승려)으로부터 성자 이싸에 관한 내용을 듣게 됐고 히미스사원에 보관중인 고문서에서 이싸에 관한 기록을 확인했다.
13살의 이싸는 유대에서 행상를 따라 인도에 도착해 브라만교 경전과 베다관련 문자를 배우면서 기도로 병 치유법과 욕망 절제법을 배웠다. 석가모니 고향 고타미데스에서 고대 팔리어를 습득해 6년동안 부처의 교리를 완벽히 이해했다. 유일신을 섬긴 이싸는 29살에 고향으로 되돌아 갔다는 내용이다.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다. 구약에 320가지 관련 예언 문자대로 성취’
예수의 생애중 13살부터 29살까지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배워 돌아온 예수는 30살부터 이스라엘에서 공생애를 살았다는 논리이다. 또 교황청에 예수의 숨겨진 생애와 진실이 숨겨진 비밀문서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추가함으로 정말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싸가 예수일 가능성은 있는가? 전혀 없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인가?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할수 없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중 한 분이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 본체이다. 예수 탄생전 약 700년전에 이사야 성경에 한 아기가 태어나는데 그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기록했다. 아기가 창조주라는 뜻이다.
이사야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미가서에는 베들레헴의 탄생과 그는 근본 상고에 태초라고 소개했다. 구약에만 예수관련 예언만 약320가지며 문자 그대로 이뤄졌다.
‘죽음을 극복한 예수, 식중독으로 죽은 부처’
예수는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렸다. 반면 석가모니는 죽음은 부처도 어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80세에 제자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으로 죽었다.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제자가 죽음에 관해 물으니 사는 것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답했다. 정직한 답변이다.
물론 예수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은 예수 탄생 수 백년전부터 예언됐고 예수도 목숨을 “스스로 버린다”고 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성경의 핵심이다. 예수는 온 목적을 다 이루고 부활 승천했다.
불교와 기독교의 구원관은 극과 극이면서도 긴밀한 면도 존재한다. 성경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각 개인의 구원을 2000년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뤘다. 영혼 구원이며, 거듭남이다.
불교는 개인 수행을 통해 구원을 이룬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지은 과거와 현재 죄, 업은 부처도 해결 못하니, 네가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죄를 스스로 해결하라는 의미다. 구원은 결국 죄 문제 해결이 초점이다.
‘성경 옛 자아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불교는 자아 없애려 고행’
성경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에게 이뤄진 영적 변화의 놀라움은 충격 그자체이다. 불교 수행승이 그토록 원하던 무아의 상태가 예수에 의해 이미 이뤄졌다는 사실을 아는가?불교에서는 무아이며 성경에서는 옛자아의 죽음이다. 동일한 성격의 내용이다.
성경을 살펴보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new self)을 입으라.” 다른 성경에는 이미 새사람(new self)을 입었고 이를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라고 선언했다.
구원받을때 내 안에 존재하던 죄에 익숙한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새로운 자아(new self) 즉 새로운 창조물이 내 안에 창조됐다는 의미다. 영적으로 이뤄진 사실이다.
불교에서 자아는 영원불멸 실체로서 ‘나’이며 이것에서 벗어나려 고행을 한다. 금강경의 핵심이 무아(無我)이며 무자성이다. 수행으로 무아 상태가 가능할까? 창조 관점에서 사람은 수행으로 자아를 벗어날 수 없다. 단지 익숙해질 가능성은 존재한다.
이것이 기독교와 불교의 근본 차이이다. 불교는 개인의 수행으로 자아를 벗어나려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가 해놓은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1600년동안 기록된 성경 수정되지 않아, 불경 대부분 후대 선사가 보강’
부처의 제자된 예수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혹되고 있는가? 필자도 대학시절 대학 도서관에서 우연히 인도로간 예수 관련 서적을 간략히 읽었다. 물론 당시에는 필자가 다닌 대학이 동양철학의 정수라할수 있는 유학을 의무적으로 배웠고 개인적으로 불교철학을 접할 기회를 가졌기에 당연하게 여겼다. 대학 3학년때는 서양철학을 배울 기회까지 가졌는데 필자로서는 행운이었다.
그런데 가장 큰 행운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수일동안 수십시간의 집중적인 짧은 성경 공부를 통해 성경이 사실이며, 죄로 인한 심판과 회개, 예수 십자가에서 이룬 사실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성경이 모두 믿어졌고 이것이 믿음의 실체임을 나중에 알게됐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이후 수천만명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 순교했다. 그런데 석가모니를 위해 과연 몇 사람이 죽었는가?
부처의 어록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 이후 불경은 선사에 의해 추가로 쓰여 졌다. 불교의 수행 방법인 간화선은 12세기 송나라때 대해선사에 의해 만들어 졌고 선불교는 인도불교와 중국도교와 혼합된 수행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불경과 수행 방법이 추가됐다.
성경은 1600년동안 66권을 40여명의 기자에 의해 쓰여졌는데 성경은 자체적으로 증거 능력을 가졌다. 문학적인 뛰어남과 불가사의한 보존의 역사, 인간에게 미치는 놀라운 변화, 통일성과 과학적인 정확성 등이다.
‘부처의 제자가 된 예수는 사기극, 성경 제대로 배워봐야 한다’
예수 탄생 시기에 불교는 인도에서 이미 소수 종교였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힘들다. 그런데 근본 하나님인 예수가 인도로가서 부처의 제자가 됐다고 책을 쓴 노토비치나 이를 강의하는 스님 모두 성경과 성경의 신에 무지하다 할 수밖에 없다.
부처의 제자가 된 예수라는 주장은 사실상 사기극이다. 차라리 예수의 제자가 된 부처가 옳다. 예수는 창조주이며 부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BC1000년전에 다윗도 1000년후에 태어날 예수를 ‘주(主)라고 지칭했다. 기독교의 예수와 불교의 부처는 정확하게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이다.
<the 대한일보 금요칼럼 수정보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