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재창조 이유, 하나님의 선한 일 위한 목적’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에베소서 기록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창세기의 기록은 흙으로 지은 첫 창조 아담을 말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이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자아,self)은 죄에 노출됐다.
이결과 영생할수 있는 영생과가 심겨있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쫒겨났다. 하얀 백지에 흑점이 찍히듯이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을 닮은 형상, 심령이 이처럼 죄로 오염됐다.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죄 성품을 닮은 유전적이며 생물학적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게 됐고 하나님을 닮은 형상, 심령이 하나님과 단절됐다. 아담의 후손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는 죄의 장벽이 가로 막혀 어느 시대든지 항상 죄가 문제가 됐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첫 창조때 흙으로 직접 사람을 창조한 것과는 달리 그후손은 시편의 기록처럼 모태에서 지었다.
시편은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다. 나의 지으심이 신묘 막측하다. 내 형질이 이루기전에 주의 눈이 보셨다“는 기록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으심이 창조주의 창조에 의함임을 알려준다.
모태에서 지음을 받은 아담의 후손 모두 창조주에게 존귀한 존재이기는 하나 모두 죄성을 갖고 태어난 죄인이기에 청조주의 거룩한 일을 맡길수가 없었다. 그래서 창조주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심령을 새롭되어 재창조된 그리스도인을 탄생시켰다.
에베소서의 ’그의 만드신바라‘는 모태에서 지음받은 생물학적 지으심이 아닌 구원받음과 동시에 영적으로 재창조된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고린도후서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new creation)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면 우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옷 입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성경이 사실이며 성경을 통해 죄를 알게된후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순서대로 거치지는 않지만 십자가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은 팩트이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었기에 새사람 창조가 가능하다‘
재창조된 사람이란 의미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 의미다.
갈라디아서2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옛사람 old self, 옛 자아가 죽었기에 재창조가 가능하다. 만약 옛사람이 내 안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재창조된 새사람이 살게 된다면 내 안의 주인은 2명이 된다. 새사람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옛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옛사람이 죽었기에 창조주는 내 안에서 하나님과 단절됐던 심령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 new self을 재창조했다. 이사람이 재창조된 사람이다.
구원받은 이후 생활은 새로 창조된 새사람, 새 자아 new self가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옛사람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하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이런류의 옛사람은 선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
새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을 재창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에베소서에 기록했다.
’ 선한 일을 선한 사람만이 가능,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만이 선한 일 가능‘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받은 재창조된 사람, 그리스도인을 굳이 평하자면 죄인인 사람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거룩한 존재이다. 세상적으로 판단이 불가하며,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획기적이며 가히 혁명적이다. 창조주는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된 사람이 사랑의 짝이 되기를 원했다. 창조주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왜냐하면 선한 일을 할수 있는 사람은 선하게 창조된 사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옛사람 old self은 마음에 온갖 죄를 지을수 있는 죄성을 가졌기에 선한 일을 할수 없다.
그래서 욥기에 죄성을 가진 인간을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생“이라고 기록했다. 재창조된 새사람 new self만이 선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새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관원이 예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분이외 선한 이가 없다“라고 답했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 가운데 선한 이는 하나님이외 없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창조주의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재창조된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이 가능하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수 있는 능력자는 한 부류밖에 없다. 예수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들, 그리스도인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신분이 창조주의 자녀이며,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수 없다. 행하는 모든 일에 악이 발려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진리 완성시에도, 재창조시에도 오직 은혜‘
골로새서에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디도서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성경에서 선한 일을 폭 넓게 해석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총체를 말한다. 선한 일을 구체적으로 세분화하면 말씀을 전파하라, 거룩하라, 서로 사랑하라, 기도하라, 교회 가운데 거하라 등의 일이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인을 재창조했고 그 일에 열매 맺기를 창조주는 바란다.
특히 에베소서의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는 바로 이전 말씀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기록이 전제됐다.
인간은 십자가의 복음 완성에 어떠한 기여나 역할도 하지 못했고, 할수도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재창조시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일방적으로 했다. 그래서 은혜이다.
선한 일을 위해 지음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고“ 또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명령했다. 이제부터 가능하다.
골로새서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위엣 것을 찾을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교회 봉사-선한 일, 자기 생각 버린 하나님 인도함과 방식 따라야‘
에베소서에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했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본 받을수 있는 능력을 갖췄기에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다.
빌립보서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기록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거룩케 재창조되었기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닮아 갈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축복과 은혜이다.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가 가능하다. 빌립보서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한다“ 교회내 모든 봉사가 성령을 통해 이뤄져야 함을 말한다. 교회의 봉사는 직분대로 행하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 단순한 노무만을 말하지 않는다.
베드로전서에”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창조주의 무한한 힘을 공급받게 된다는 약속이다. 이런 류의 봉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된다.
봉사시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지식과 판단과 경험으로 봉사를 고집하려면 차라리 봉사에 손을 놓더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게 중요하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가야 하나님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다. 그동안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숫자도 적지만 하나님의 방식대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복음은 한 세대를 넘지 못하고 촛대가 옮겨진다고 하지 않은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