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고난, 선악과 따먹은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며 핵심적인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난’을 있게 한 필연적 원인이 된 중요 사건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선악과 사건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고 명령을 했다. 성경을 아는 상당수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을 알면서도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굳이 만들 필요가 있었나?”라고 의문을 나타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된다면 선악과에 숨겨진 깊은 뜻을 알수 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준 하나님에 대한 아담의 사랑을 확인키 위한 최소한의 명령이었다. 아담에게 자유의지가 있었기에 선악과를 먹을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뱀의 꼬임에 넘어간 하와에 의해 아담도 선악과를 먹었다. 인류 역사가 선악과를 먹은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선악과의 불순종 사건은 인류에 절대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영적 사망과 육신 사망,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
경고대로 영적인 사망과 함께 아담과 하와에게 뿐만 아니라 그 후손 모두에게 육신적인 사망이 찾아왔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기록된 말씀처럼 이때부터 인류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는 성경의 기록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은 모두 죄인이 되었다는 기록의 말씀이다. 범죄의 결과 ‘죄 삯은 사망’이라는 상상할수 없는 대가가 주어졌다.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생물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성경 로마서의 기록처럼 이 땅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기록과 시편에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말씀이 일맥 상통(一脈相通)하다.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죄를 용서받는 영적인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그들에게 바로 나타난 육체적인 증상에 대해 성경은“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선악과 사건 이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의 기록처럼 벌거벗은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양심의 작동, 선악과 따먹은 날’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에 사이에 숨은지라”는 성경 기록은 당시 아담과 하와의 심경 변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불 순종후 두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하여 숨었다”고 고백했다.
두 사람에게 수치심과 두려움을 준 것은 두 사람의 불순종이 원인이 되었다. 선악과라는 열매가 아담과 하와의 몸에 생물학적으로 신체적 변화를 줬다는 기록은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양심의 변화의 결과로 수치심과 두려움이 생겨났다.
선악과 사건이후 아담과 하와에게 수치심이 생긴 것은 1차적으로 육신의 눈을 통한 것이지만 실제는 내면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양심은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정죄)라는 기록된 말씀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아담과 하와의 양심이 작동하면서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양심의 본능적인 작동이다.
양심이 오염되지 않은 아담과 하와의 양심은 불순종으로 즉각 반응을 나타낸 것이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모든 사람 마음 안에 새겨져 있는 율법의 행위 즉 정죄(죄를 정함)로 인한 결과로 ‘죄’를 짓는 인간에게 처음 나타나는 마음 상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양심이 없다면 인간이 죄를 느낄수 있는가? 양심이 없다면 죄를 짓고도 죄를 죄로 여기지 않기에 죄를 죄로 느낄수가 없다. 그러나 그 양심도 무뎌지게 되는데 죄를 처음 지을때와 10번지을 때, 100번 지을 때의 양심이 느끼는 감정이 똑같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동일 범죄를 수십번을 짓고도 얼굴을 당당하게 드는 사람들도 있다.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 양심’
양심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수준을 주셨는데 살아가면서 개인차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양심은 가변적으로 무디어기도 하며, 약해지거나 마비되기도 하며, 불완전해 지기도 한다.
양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영적인 작용으로 양심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며, 진화론으로는 설명이 불가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을 닮은 영의 속성이다. 양심이 없다면 율법이 주어져도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해서 조차 죄를 죄로 여길수 있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단지 율법을 범할 경우 그 대가를 피하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양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영적인 속성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흙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연약한 육신이 아닌 육신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의 존재 ‘영혼’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속성이 담긴 영적인 작용의 하나가 양심이다.
그 양심은 로마서의 기록처럼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정죄)이기에 도덕적으로든, 양심적으로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가책(정죄)을 받게 된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양심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창조의 중요한 증거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