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철학, 인간의 본질 보려 노력’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는” 프랑스의 무신론자인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은 성경을 비튼 실존주의이다. 그러므로 성경 친화적인 실존이라 해도 무방하다. 물론 이 의견에 사르트르는 아마 수긍하지는 않을런지 모른다. 다만 역설적 의미의 성경 친화적이라는 뜻이다.
실존철학은 독일이 1차세계대전에서 패전후 불안에 직면한 사회현상 가운데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세계 2차대전후에는 프랑스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실제 19세기부터 실존주의는 시작됐지만 세계 1차와 2차 대전를 거치면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에 자각하기 시작했다. 전쟁후 비참한 경제 상황과 군인과 민간인의 사망, 고통 가운데 삶의 본질을 보려 노력했다.
‘키에르케고르 실존, 구원받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물음에서 출발’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 이후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실존이란 용어의 의미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 의미있게 사는 것’으로 설명했다.
실존주의는 유신론과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분류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로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인간의 실존적 과제를 참된 자기 자신 본래로 되돌아가자고 노력했다.
무신론자 사르트르의 실존은 창조자에 의해 만들어진 본질을 부인하면서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자유로운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실존을 자기의 행동을 선택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주체라고 설명했다.
무신론을 표방한 사르트르의 실존은 존재를 밑바탕에 깔아 창조주가 없는 실존과 본질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사유에서는 창조주를 역설적 인정했다.
‘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의 존재를 전제로 사유’
이런 현상은 사르트르이외에도 무신론 실존주의자 대부분에게 적용된다. 이들은 무신론의 사유 밑바탕에 신의 존재를 전제했을까? 그이유는 신의 존재를 성경속 창조의 신이 아닌 이 세계에 더해진 또 다른 존재로서 신으로 봤기 때문이다.
중세이후 기독교는 신자에게 율법과 믿음을 지속적으로 강요했다. 교회의 이같은 태도를 철학자는 성경 속 신의 강요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신이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침해한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사유로 만든 여러 종류의 신을 제시했다.
성경의 권위도 상실됐다. 창조 과정이 기록된 창세기가 비유나 상징으로 이해되면서 에덴동산과 아담 등이 상상의 장소나 인물로 받아 들여졌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과학을 새로운 ’로고스‘인 신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는 기독교적 가치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가치관으로 매도됐다. 그 중심에 니체가 있었다.
’니체의 신은 죽지 않았다. 니체도 은혜 베푼 야훼를 간절히 바랬다‘
니체는 신의 죽음으로 인류 역사가 더 높게, 더 새롭게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주인공 차라투스라에게 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다.
유대인 니체는 ’신이 죽었다‘한 배경에 1900년동안 피로 써 내려간 선민 유대인의 고난과 핍박의 역사가 작용했다. 유대인의 야훼 하나님이 선민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의 호소로 니체의 여린 마음이 차라투스라를 통해 투영되었다. 유대인의 핍박과 고난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이다.
무신론자나 유신론자 상당수가 창조주가 인간 창조 후 삶의 99%이상을 창조주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오해했다. 성경의 창조주는 인간에게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며 운영할수 있는 결정권인 ’자유 의지‘를 주었다.
자유 의지는 창조주 안에서 자유 의지였고,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자유 의지이기에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자유 의지가 아닌 99.9%의 자유의지이다. 단 몇 가지만의 불가피한 제한이다.
’성경의 실존, 창조주 앞에선 아담 통해 나를 본다‘
창조주 안에서 자유 의지의 본질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본질과 비슷하다. 인간 스스로 선택하며 결정하는 삶을 사르트르는 실존의 본질로 판단했다.
현대인의 실존은 ’내가 현재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이다. 실존의 근본적 물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실존이란 무엇일까? 창조주 앞에 선 ’나‘이다. 스스로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삶과 사후의 삶이 결정된다. 최초의 사람 아담이 창조주 여호와 앞에서 선 그 모습 속에서 아담에게 투영된 나의 모습이 성경을 통한 ’나의 실존‘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