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20절, 신앙생활의 핵심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믿음의 시작점이면서 동시에 신앙생활의 출발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믿음이 생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출발점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다. 매일 수시로 머물러 묵상하면서 신앙의 고백이 이뤄져야 할 곳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이처럼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믿음 시작점이 십자가임은 모두 안다. 반면에 신앙생활의 출발점도 십자가여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매일 수시로 십자가 관련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에서 십자가의 중요성을 간과함이다.
그중 갈라디아서2장 20절은 신앙생활의 핵심 내용이 모두 담겼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이해하려면 자아(self)를 알아야 한다. 자아를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의 핵심 말씀인 갈라디아서2장20절을 알기 어렵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자칫 무조건적이 믿음으로만 가야되는 율법아닌 율법 생활에 빠지게 되면서 즐겁고, 유익한 신앙생활이 어렵다.
‘사람에게 자아는 최소 둘이상 존재, 자아는 경험 등이 모인 나의 총합체’
먼저 자아란 무엇인가? 뇌과학을 통해 자아를 이해하면 성경의 자아를 이해하는데 크게 보탬이 된다. 뇌과학에서 자아(self)는 자기를 조절하는 ‘나’와 조절 대상이 되는 ‘내’가 존재한다. 조절 대상이 되는 내가 자아(self)이다. 자아는 나의 모습이나 행동, 정체성, 경험 등의 총합체이다.
자아는 최소 둘 이상의 자아가 존재한다. 우선 조절하는 내가 존재하고, 내 안에 조절 대상이 되는 내가 존재한다.
로마서에 속사람과 겉사람, 다른 성경에 영혼과 육체로 이분법으로 기록했지만 다른 성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자아를 기록됐다. 성경의 핵심을 알기 위해서는 이분법을 넘어서 자아를 알아야 한다. 신약성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자아를 설명하고 있지만 한국인에게 자아는 너무 생소한 개념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2장 20절 신앙의 핵심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갈라디아서2장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십자가에 죽은 옛 자아(old self), 영적 사실이며 매우 중요한 구절’
신앙생활의 시작점이 십자가인 이유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영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상당수 그리스도인이 깜짝 놀란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죄를 용서하신 분은 오직 단 한 분 예수그리스도인데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말도 안된다며 성경을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적 사실 아닌 상징이라고 판단하고 그냥 넘어간다. 성경 말씀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직하지 않는 불순종의 태도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매우 중요한 말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으로 그리스도인을 위해 준비놓은 길이다. 준비해 놓은 길로 가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매우 힘들어 지는게 당연하다. 창조주께서 예비한 길이 아닌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한 길을 가려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생각해 보라.
‘ 옛사람이 죽은후 하나님을 따라 내 안에 창조된 새로운 자아(new self)’
상징으로 판단한다면 성경 해석의 심각한 오류이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나님이 준비해 놓은 신앙생활의 그 길의 출발선상에서 놓이게 된다.
십자가에 죽은 옛사람은 옛자아(OLD SELF) 이다. 복음이 영적 사실이듯이 옛 자아의 죽음도 영적 사실이다.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있다. 옛 자아가 죽었다는 기록을 상징 처리하면 중요 말씀도 상징이 된다,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옛사람 OLD SELF은 죄에 익숙하고 유혹에 약하며, 죄 짓기를 즐겨하는 죄성의 옛사람이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구원받기전 인간의 마음은 마가복음에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기록처럼 죄로 오염되어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구조이다.
’구원 받기 전과 후 마음이 동일하면 거룩한 생활은 불가능‘
내 마음이 구원받기 전과 후가 동일하다면 거룩한 삶을 살려는 의지와 달리 행동으로 실행하는 과정에서 죄성에 오염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는 전도서 기록은 사람의 모든 행동이 위선임을 알려준다. 모든 행동에는 온전한 선함이 없다는 내용이다.
내 안이 더러우면 신앙생활도 거룩한 생활이 아닌 오염된 생활이 된다. 내 안이 더러우면 거룩한 성령도 내 안에 들어올수 없다. 성령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에 익숙한 옛 자아가 죽어야만 거룩한 말씀을 실행할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된다.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육체속에 존재한다.
갈라디아서2장에 ”그런즉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이유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며 ’내가 육체 가운데 살고 있음‘을 밝혔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이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기록이다.
옛사람은 죽고 내 안에 새로운 내가 창조됐다. 갈라디아서에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내가“ 골로새서에는 “옛사람(old self)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new self)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옛사람을 OLD SELF(옛자아)라고 NIV에 기록됐다. 십자가에 죽은 나를 골로새서에 옷을 입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새사람을 입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자아는 리모델링되지 않고, 새롭게 창조된 자아다‘
에베소서에는 옛사람이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 NEW SELF를 입으라고 기록했다. 그 새사람(new self), 즉 새로운 자아를 살펴보면 정말 놀랍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정말 기가 막히고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가 듬뿍 담긴 기록이다.
내 안이 리모델링되지 않고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은후 새롭게 창조된 내가 존재한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창조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 힘이 넘친다. 내 안에 새로운 자아의 존재여부를 알지 못해도 말씀에 감동을 받고 십자가를 묵상하면 은혜와 감사와 눈물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를 원하는 힘이 이곳에서 나온다.
원래 나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기 원하는 마음이 원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생겨났다.
그렇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흘린 보혈은 죄인을 구원할 능력이 충분하고 차고 넘친다. 죄에 익숙하며 유혹에 약한 옛사람, 본래 죄의 성품을 지닌 옛 자아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나의 실체라면 나는 변화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위한 삶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아마 처절한 선과 악의 대결 속에 하루하루 힘들게 살고 있으리라.
’내 안은 모두 새롭게 바뀌었다, 이제부터 격에 맞는 삶 살아야 마땅‘
창조주는 그리스도인이 옛사람 OLD SELF를 이겨내는데 평생 전력을 쏟으며 힘들게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옛 자아가 내 안에 살아 있다면 전력 질주해도 죄성이 깃든 옛자아의 삶이기에 신앙생활의 한계가 분명하게 그어지게 된다.
욥기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 낼수 있으리까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기록은 옛 자아와 함께 사는 삶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갈라디아서2장20절은 십자가를 통해 믿음을 가질 때 구원받은 사람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음을 선언한 대사건을 기록했다. 실제 영적 사건이다. 옛사람이 죽고 그 자리에 창조주는 새사람new sel이 창조됐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새로운 자아가 함께하면서 양측간의 다툼이 일어난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고린도전서에 주와 합한 사람은 한 영이라고 기록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내 안의 새로운 자아와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로 되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의 의지와 힘이 충만한 상태다. 우리는 유지하기를 노력하면 된다.
새로운 자아도 하나님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기에 한 영이 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옛 자아와 거룩한 그리스도의 영은 한 영이 될 수없다. 근본이 다르기에 그렇다.
로마서6장에도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를 죄의 몸이 멸하여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또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다.
죄값을 치른 것은 예수그리스도지만 그 십자가에 죄성을 지닌 옛자아가 못박혀 죽어야만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 구원받은 자가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이유이다.
로마서에 새로운 자아를 다른 측면에서 기록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으심에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을 얻게했다”고 기록했다.
’신앙생활은 맨땅에 헤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준비후 동행하는 생활‘
여기에서 새 생명은 옛자아가 죽은후 창조된 새로운 자아 new self 이다. 새로운 자악 new self이기에 죄가 그리스도인을 주관치 못한다. 그래서 죄에게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로마서에 기록했다. 놀랍지 않은가?
신앙생활은 ‘맨 땅에 헤딩을 하는 것’처럼 구원받은 후 자신의 힘으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홀로 모든 준비와 대비하면서 걸어가는 힘든 여정이 아니다. 창조주께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함께 동행하자는 권면이기에 신앙생활이 힘들지만 즐겁고, 이겨낼 힘을 주고 이겨내라고 하니 의지만 있으면 이겨낸다.
고린도전서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자.
창조주는 그리스도인을 위해 시험과 고난의 길을 허락하지만 이겨낼수 있도록 모두 준비했다는 의미다. 특히 내부적으로 이겨낼수 있는 구조가 됐다.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과 심령이 새롭게되어 하나님에 의해 지으심 받은 새사람이 존재한다.
‘토저목사 ’내 자아를 버려라‘ 저서에서, 갈라디아서2장 중요성 강조’
갈라디아서2장 말씀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며 신앙생활을 성숙에 이르는 지도와 같다고 ‘ WHO PUT JESUS ON THE CROSS?’(내자아를 버려라 한국 제목)의 저자인 토저목사는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이 갈라디아서2장20절에 이뤄진 영적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삶의 원리에 적용을 하지 못한다. 토저는 객관적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주관적 체험이 되어야 한다고 ‘내 자아를 버려라’저서에서 강조했다.
토저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생활의 본을 세례요한이 보였다고 소개했다. 요한복음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이라고 전했다.
그러면 갈라디아2장의 말씀을 내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은 갈라디아서2장20절이 영적 사실임을 인정하면서 수시로 묵상하면서 고백과 간구하는 생활이다.
성경의 놀라운 비밀이 묵상에 감춰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 매일 수시로 갈라디아서를 묵상했야 하는지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그리 창조했기 때문이다.
뇌과학으로 쉽게 설명하겠다. 대인소통은 보통 어떤 형태로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말한다. 그런데 내면 소통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행위로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내면소통이 나를 변화시킨다’
내가 나에게 하는 진실된 말은 나 자신에게 즉각적 효과를 갖는데 이것이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래서 내면 소통에는 자아를 변화시키는 힘이 존재한다. 내면 소통의 형태중 셀프토크가 그리스도인의 기도, 묵상 등과 비슷하다.
플라시보 효과는 내적 셀프토크 즉 내면 소통을 반복하면 기억에 저장되면서 나 자신을 실제로 그렇게 변화시킨다. 플라시보 효과 즉 위약효과도 비슷한데게 믿음이란 무엇인지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례이다.
사람은 일상적으로 어떤 생각을 자주하며 내 자신과 어떤 내면 소통하는지에 따라 어떤 사람이 되는지 결정된다고 뇌과학은 실증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 가운데 살면 의식의 변화를 통해 그러한 삶을 살게 된다.
요한복음의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실천이 가능한 이유는 무얼일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경험을 가진 내가 존재하고, 이를 실천할 하나님을 따라 지음받은 새 자아가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능력을 갖추고도 실천을 하지 않으면 게으름과 불순종 때문이다. 게으르면 실천할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사람의 비밀을 성경에 기록했고 우리 시대 뇌과학이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비밀을 밝혀낸다.
그리스도인이 과거처럼 죽은 옛 자아 중심적인 삶을 살려할 때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에 기쁨이 없다. 내 안의 그리스도의 영과 새 자아가 하나가 되어 잘못된 생각과 충돌을 하면서 삶이 좌충우돌하며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은 그리스도인이 상당수에 이른다. 그 이유를 모르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안타까울 뿐이다.
‘토저목사. 오직 기독교만이 자아문제 해결 가능하다 강조’
새 자아가 내 안에 창조되었기에 죽은 옛 자아 중심의 삶을 살수도 없고 새사람인 내가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 자아 즉 새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새 자아 중심의 삶을 사는게 가능하다.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옛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고 그리스도의 영과 새로운 자아가 한 영이 되어 가는 길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다. 그 길은 내 의지의 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이다.
반역과 불순종, 불신의 결정체로 나를 얽매게 하는 자아중심적 삶은 이미 해결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옛 자아 중심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토저는 갈라디아서2장20절 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알 때 실천하면서 살수 있고, 자아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신앙은 오직 기독교뿐이라고 강조했다. 토저는 거듭나지 못한 자아를 자연적 자아로 불렀다. 자연적 자아가 죽어야만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삶을 살게 된다고 설명했다.
죄의 유혹과 습성에 물든 옛 자아, 즉 자연적 자아는 선한 것이 없기에 온전하게 멸해야 내가 죄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