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고난의 두가지 놀라운 사실, 영원한 속죄와 하나님 형상회복’
예수 십자가 고난은 영원한 속죄를 위함이다. 십자가 고난의 또 하나의 목적이 존재한다. 하나님 형상을 닮은 속사람의 회복이다.
예수 십자가 고난은 이사야에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켰다”는 기록을 이루기 위해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지고 속죄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다. 왜 피 흘려 죽어야 했는가? 사람의 생명이 피에 있고, 피흘림이 없으면 용서함이 없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그 십자가에서 죄용서와 함께 이룬 또 하나의 놀라운 영적 사실은 죄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형상 회복이다.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이미 이뤄졌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형상 회복은 신앙생활의 사실상 핵심 요소이지만 사실 이를 중요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빌립보서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기록과 함께 에베소서에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했다.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도, 하나님을 본 받는자가 될 수도 없고 가능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대단한 영적 신분, 왕같은 제사장-하나님의 자녀’
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길수 있을까? 이 말은 구체적으로 누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만약에 이 땅에 하나님을 본받을 성품의 소유자가 없다면 성경에 그같은 기록을 하지 않았으리라.
이 땅에서 오직 죄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게 가능하다. 왜 가능할까? 구원받았기 때문인가? 그 이유도 맞지만 정확한 정답은 아니다.
구원은 예수 십자가 고난을 통해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여진 상태를 말한다. 십자가의 고난을 지식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확실한 믿음은 확실한 지식 위에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온전한 마음이 전제된다
구원받은 이후 성경을 통해 내 안에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왕같은 제사장 직분임을 알게 된다. 구원도 영적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신분도 영적 사실이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영적 신분에 눈이 가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왕같은 제사장이다. 이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수 있는 유일한 신분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영적 신분은 대단하다.
‘하나님 뜻대로 살기에 벅찬 그리스도인 왜 그럴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에는 벅차다. 평생 죄 가운데 살아왔던 죄성을 가진 죄인이이었기에 구원받은 이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 노력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하나님의 뜻대로 더 잘살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벅찰 때가 많다. 이 상태를 하나님은 모르실까? 너무나 잘 알고 있으리라.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녀를 삼으신후 이땅에서 평생을 속사람과 겉사람간의 다툼에 휘말려 살다가 주님 앞에 서라는 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이 두가지 일을 이룰수 있기 때문에 기록했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 형상의 회복 의미도 이해하기 쉽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직접적 이유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단의 직접 유혹을 받은 후 하와는 선악과를 다시 살펴보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실과로 마음이 유혹되어 따 먹었다.
‘하와가 유혹받은 이유, 믿음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창조의 비밀’
평상시 관심조차 없었던 선악과에 유혹을 받기 전과 후 하와의 마음은 왜 달라졌을까? 이같은 과정은 하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창조의 비밀이 숨겨졌다.
믿음이다. 유혹을 하는 자의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유혹을 믿게 된다. 플라시보 효과와 비슷하다. 유혹을 받으니 하나님의 경고와 그동안 쌓은 신뢰가 깨졌다. 시이소 효과다. 믿음은 한쪽을 택하면 다른 쪽에 의심이 생긴다.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한 하와와 아담에게는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세상이 열렸다. 대단히 큰 충격이었리라.
창조주 하나님과 약속을 깬 불순종의 시작, 죄가 처음 세상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지구상에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이 시작됐다. 그래서 사망이 왔다. 과학적으로 비가역적인 현상이다. 한쪽 방향으로만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늙음도, 죽음도 마찬가지다.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단의 말을 왜 믿었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신성이 담긴 영원성과 초월성, 변하지 않는 사랑 등의 영(sprit)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조주가 아담에게 죄를 묻기도 전에 사람 안에 양심의 법이 작동하여 숨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주를 피하게 만든다. 선하고 거룩한 창조주기 때문이다.
‘선악과 따먹은 불순종의 날, 아담안에 존재한 하나님 형상 훼손됐다’
하나님이 “네가 어디있느냐”라는 말에 아담은“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죄를 고백했다. 이후 아담은 불순종으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났다. 창조주는 죄로 말미암은 아담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가죽옷을 지어입혀 가려 줬다. 복음의 그림자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창조주의 명령을 불순종한 아담에게 주어진 대가는 아마 지구가 창조된 이후 가장 비참하며, 고통스러우며, 오래 지속되는 유일무이한 저주였다. 현재도 창조주의 저주는 지구상 모든 피조물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치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담과 하와에게 가장 큰 타격은 무엇일까? 에덴동산에서 쫒겨나 먹고사는 문제였을까? 아니다. 아담과 하와 창조시 가장 큰 축복이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속사람이 훼손됐고 그 후손도 마찬가지로 훼손된채 태어나게 됐다는 사실이다.
창조주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말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닮은 모양과 형상이 왜곡되고, 훼손되며, 침해를 받게했다.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 형상이 얼만큼 훼손됐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할수록 죄가 세상에 충만해졌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시간이 지나 갈수록 더 심각하게 훼손되고 침해됐음을 말해준다.
창조이후 약 4천년동안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더욱 훼손되고 심각하게 왜곡되어 가던중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2천년전 유대 땅에 예수그리스도가 왔다.
그리스도인이 매우 궁금하게 여기는 것중 하나가 창조시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아담의 상태가 어떠했는지이다.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2천년전 유대 땅에 오신 예수가 그 답이다. 그분이 하나님 자체이다. 밀씀이 육신되었기에 하나님 형상과 모양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다. 빌립이 예수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라고 요청했다. 예수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알려줬다.
‘구원후 하나님 형상 회복은 몇% 됐나? 100% 회복됐다’
그러면 죄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아담의 죄로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얼마만큼 됐을까? 성경은 분명하게 아담과 같은 상태로 회복됐음을 말해 준다. 단지 그리스도인이 이를 믿지 않고 무시하고, 무지하기에 회복된 하나님 형상의 힘을 입지 못한다는 점은 너무 안타깝다.
에베소서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기록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말에 상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옛사람은 NIV성경에 ‘OLD SELF 옛 자아’라고 분명하게 기록됐다. 옛자아를 옷을 버리는 행위처럼 쉽게 벗어버릴수 있다는 의미다.
좀 더 정확하게 갈라디아서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기록했다. 이 성경에는 자아가 아닌 ‘내’가라고 기록했다.
성경은 짝을 맞춰서 이해해야 한다. 로마서에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에서 ‘옛 사람(our old self)’은 옛 자아이다.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내 안에 재창조가 가능했다. 그래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더럽혀진 심령을 새롭게 했고, 동시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재창조됐다.
골로새서에는 새사람(new self)을 입었으니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라고 기록했다. 아담의 죄로 인해 훼손된 사람속의 하나님의 형상이 100% 회복됐음을 알수 있는 기록이다.
확실하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삶을 살수 있도록 내 안을 새롭게 재창조했다. 창조주 하나님만의 방법이다. 이 중대한 사건은 사실이다.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은 새롭게 창조된 사람이 안에 있기에 하나님을 본 받을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게 가능하다. 왜냐하면 내 안이 이미 하나님이 재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래서 이 사실을 매일 수시로 묵상하며 인정하며 사는 삶이다. 그러면 삶이 달라진다. 힘있게 실질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내 안이 새롭게 재창조됐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알지 못한 것의 차이는 플라시보효과만큼 차이가 난다. 직접 묵상해 보면 큰 차이를 몸으로 직접 느낄수 있으리라. 필자에게 갈라디아서2장20절이 신앙 성장의 밑바탕이며, 힘이며, 근원이 되고 있다고 말해도 표현이 아직은 부족하다.
그리스도인의 이땅에서 삶은 이미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 하나님을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 가능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