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옛 계명과 새 계명 동일, 단지 기준과 실천의 차이’
‘사랑’에는 설렘과 따뜻함과 ‘함께’라는 의미가 녹아들어 있기에 즐거움으로 항상 맞아들인다. ‘사랑하라’는 강제성을 뛴 계명에는 단지 ‘하라’만 첨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숨쉬기조차 어려움을 느낀다. 마음에서 절로 나오는 사랑은 사랑하기 쉽다. 억지로 마음에서 사랑을 끄집어 내기는 쉽지 않고 실행하기도 어렵다.
‘사랑하라’는 계명이 그렇다. 성경에는 옛 계명과 새 계명 모두 ‘사랑하라’는 삶의 핵심 실천 기준으로 제시했다. 옛 계명과 새 계명은 동일한 계명일까, 아니면 차이가 있을까?
실천의 잣대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옛 계명은 기준이 너무 높아 실천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새 계명은 그렇지 않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둘째 계명은 옛 계명이다. 옛 계명의 사랑 실천 기준을 인간의 육체와 마음에 뒀다.
얼핏 보기에 실천하기 쉽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오산이다. 옛 계명을 지켜보려한 사람은 누구나 계명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계명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지켜 나가면 되지 왜 어렵다고 판단하느냐고 물어 올수도 있다.
’옛계명 실천기준, 실천자의 몸-자기 몸처럼 이웃 돌보기는 사실상 불가‘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옛 계명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자기 몸처럼 타인을 사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적당하게는 모르지만 자기 몸처럼 이웃을 돌볼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하기는 더 어렵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의 사용 방법과 성품 의미와 사용방법, 힘의 사용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이후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가능하지 않다.
그래도 할수 있는데 까지는 해보는게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수 있다. 실천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성경의 요구는 율법대로 실천해야 한다. 율법의 특징은 어떤지 보자.
시편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며,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며,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확실하여 다 의롭다“고 했다. 로마서에는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말했다.
율법은 완벽하고 거룩한 법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국가가 제정한 법과의 차이점은 마음과 행위이다. 국가제정법인 형법은 행위시 처벌한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온갖 죄를 처벌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렇지 않다. 행동과 마음으로 짖는 모든 죄를, 호리만한 죄라도 결과는 사망 즉 죽음이다. 율법의 요구다. 하나님의 율법은 공의뿐이다. 관용과 정상참작이 없다. 하나님 율법의 특징이다. 사망은 먼저는 육신이지만 죽음이후 영혼도 심판받아 둘째 사망에 떨어진다.
’하나님의 율법 완벽, 옛 계명 완벽하게 지킬 사람 없다‘
옛 계명을 지킬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로마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다. 갈라디아서에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하는 사람은 축복이 아닌 저주아래 있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율법은 100% 마음과 뜻을 다해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 대상자이다.
전도서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고 말했다. 의인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세상 기준의 의인은 존재하지만 성경기준의 의인은 없다는 뜻이다. 만약 온 율법을 지켜 오던중 단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야고보서는 율법 99.9%를 지켜왔더라도 심판을 피하지 못함을 지적한 것이다.
사람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게 불가하다. 그러면 율법을 준 목적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킬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 알게되면 율법의 소명은 다했다.
인간의 한계인 죄성으로 인해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수 없다면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왜 주셨을까? 또 죄를 깨달으라고 주셨을까. 아니다. 지키라고 확실하게 주셨다. 어떻게 가능한가?
’새 계명 실천 가능한 힘이 내안에 내재, 그리스도가 내게 준 사랑‘
요한복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나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 계명을 준이후 요한복음에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니“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직접 준 새 계명을 먼저 살펴보자.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다. 새 계명의 사랑 기준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희생에 근거를 둔다. 이때는 십자가 고난이전이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를 아카페적 사랑이라 한다.
로마서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일방적, 무조건적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새 계명도 옛 계명처럼 실천하기가 매우 힘들까? 옛 계명처럼 새 계명도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둘 중 하나다. 그 의미를 모르거나 성경대로 거듭(중생,구원)나지 않은 사람이다.
‘새 계명 실천의 힘 믿음에 있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 죽었다’
새 계명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믿음이다. 지킬수 있는 힘을 십자가에서 실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 졌다. 믿음 가운데 실천이 가능하다. 어떤 믿음이 필요할까? 내 안에 그리스도 사랑의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 존재하기에 믿음의 눈으로 실존을 믿으면 된다. 내 안에 실존하지만 존재 사실을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차이는 엄청나다.
플라시보 효과 즉 위약효과는 내가 나에게 진실되게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즉시 효과를 발휘한다. 동일한 원리다. 십자가에서 받은 사랑이 내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에 확신을 가지면 그때부터는 신앙이 달라진다. 급변하게 된다.
내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 사랑의 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이 그리 힘들지 않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난 가운데 즐거움이 함께 한다. 그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알지 못하면 육신의 성향으로 사랑을 실천하기에 항상 힘들다.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든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육신의 욕구와 성령의 욕구간의 갈등을 기록했다.
새 계명을 실천하려면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하는가?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갈라디아서2장에 ”내가(옛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로마서에”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는 이세상 풍습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던 옛사람이 죽었다는 의미다.
‘심령이 새로워진 새사람, 의와 진리로 거룩해진 새사람의 성품-그리스도 닮았다’
에베소서에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갈라디아서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죄의 본성)와 함께 그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했다. 고린도후서에는 새로우 피조물이라고 했다.
옛사람이 살아오며 동행했던 죄성은 구원받으면서 성령이 임하면서 동시에 새사람이 들어왔고 동시에 새사람의 성품이 들어왔다. 새사람은 에베소서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입으라는 각 사람의 의지적인 행위가 작용해야 한다. 골로새서에는 입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새사람을 입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옛사람의 죄성 가운데 생활하면서 죄와 다투는 일상이 된다. 죄와 머리가 터지도록 다투는 그리스도인이 의외로 많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이다. 평생 죄와 다투면 언제 주의 뜻을 실행할 여유를 가질수 있겠는가. 전진 전능한 예수께서 아들이 죄와 일상적으로 다투기를 원하실까? 물론 죄와 피흘리기까지 다투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만 죄와 다투라는 뜻은 아니다.
죄성과 일체인 옛사람으로 죄를 이겨내 깨끗이 살려고 하는 행위가 넌센스다. 검정 숯을 깨끗한 물로 평생 씻는다 할지라도 깨끗해지지 않는다. 불교 수행자들이 평생 죄(번뇌)를 이겨내 무아상태가 되려 노력하지만 불가한 이유가 엣사람과 일체인 죄성 때문이다. 오랜세월 수행한 사람들 가운데 육체와 자아간의 분리현상이 확인되기도 한다. 무아는 아니다.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준 이유는 실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심령이 새롭게되는 새사람을 입지 않았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내재된 힘이 없다. 이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옛사람이 그대로라면 어떻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실천할 힘이 있겠는가. 새계명을 실천할 힘을 이미 준 상태에서 노력해서 꺼내 사용하라는 것이다.
‘육신의 성향이란? 죄성의 습관, 믿음의 대상은 항상 실존’
왜 새 계명이라 했을까? 사랑하라는 계명은 본래부터 내려온 옛 계명인데 굳이 새 계명이라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새 계명은 새사람만이 실천할 힘이 있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 칭한 것이다.
만약 구원받은 이후에도 옛사람의 죄성이 그대로라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이 일상이 된다. 왜 구원 받은이후에 비로소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 죄의 법과 충돌할까? 옛사람이 그대로고, 옛사람의 죄성이 그대라면 마음에 충돌이 일수가 없다. 구원받았다는 뜻은 성령이 내안에 임재했다는 뜻이며 성령의 임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는 의미다.
내 안이 완전히 바뀌었다. 구원받기전에는 육신의 법, 죄의 법만 존재했는데 성령이 임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법, 마음의 법이 새로 생겨났기에 기존의 죄성의 습관이 배인 육신의 성향과 다툼이 인다. 당연하다.
갈라디아서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맞다. 내 안에 임재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마음의 법,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따르는 삶이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갈등이 줄고 성령을 온전히 따르면 육체의 습관과 충돌이 점차 사라진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실천할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존재하는데 그힘을 사용할 방법은 오직 믿음이다. 성경 가운데 항상 믿음의 대상은 실존하지만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